Saturday, May 13, 2006
독서]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의 고언 / 계간 문학동네 1998년 가을호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다가 보니까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신춘문예 등 각종 문학 공모전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귀감이 될 만한 좋은 내용입니다.
문화일보 기사: '독서가 사람과 사회를 건강하게' 문학평론가 도정일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03122301012230065002
그럼 도정일 교수는 어떤 소설을 높이 평가하시는 걸까요.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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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문학을 찾아서 ― 도정일 (계간 문학동네 2000 년 가을호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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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소설입니다: [독서] 이지형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 / 제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 프리뷰
계간 문학동네 1998년 가을
문학동네신인작가상
본심 심사평
도정일
나는 이런저런 기회에, 우리 소설문학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두 차원에 걸친 빈곤―서사의 조직 및 제시 기술의 빈곤과 문제를 구성해내는 사유의 빈곤을 지적한 바 있다. 두 차원이라 말했지만, 사실 이 차원들은 소설서사를 읽을 만한 이야기 장르이게 하는 조건의 거의 전부를 포함한다. 조직·제시·주제·구성은 근대 장르로서의 소설의 생명이며, 이것들이 빈약한 수준에 머물 때 소설은 씌어질 이유도 읽힐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이들 층위에서의 빈곤을 지적하는 일은 우리 소설문학이 사실은 아주 근본적 의미에서 전반적 허약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진단과 다를 것이 없다. 대체로 우리 소설들은 이야기를 잘 만들지 못하고 어떤 문제를 흥미롭게, 소설적으로 잘 구성해내지도 못한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우리 소설문학이 이 모양으로 나가다가는 독자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이다. 이 전반적 빈곤은 무엇 때문인가? 어째서 지난 십 년 동안, 혹은 이십 년 동안, 내놓고 자랑할 만한 뛰어난 작가를, 이야기꾼을, 우리는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꾼들은 다 죽었는가? 이번 제3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본선 심사 독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나에게 이 질문은 다시 괴로운 의문부호를 달고 다가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신인작가상이라는 이름의 공모전은, 내가 알기로는 『문학동네』의 것이건 다른 어디의 것이건, 반드시 무슨 경천동지할 걸작을 뽑기 위한 제도는 아니다. 놀랄 만한 작품이 나타나 온 문학동네가 조상들에 고하고 석 달 열흘 잔치판을 벌여야 할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신인 공모전의 기능은 땀방울 흔적이 뚜렷하고 재능이 뚝뚝 뜨는 작품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땀 흘릴 준비와 용의가 있어 보이는 신예작가를, 큰 오차 없이 발굴해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문단이 해마다 이 종류의 신인상에 거는 기대는 적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선가 혼자 고독하게, 뜬구름 하늬바람 말고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동네 똥개도 알아주는 일 없이, 작가가 되기 위한 힘든 훈련을 쌓으며 글쓰기를 준비해온 어떤 재능이 문득 한 뭉치의 원고를 들고 나타나 문을 두드릴 때의 그 이상하고 신선한 노크 소리에 대한 기대이다. 그의 작품이 완벽한 것이기를 심사자들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한 한 그 작품은 소설쓰기의 튼튼한 기본 기량 위에서 어떤 새로운 목소리와 시각, 새로운 어법으로 이 낡고 지루하고 형편없는 세계에 새 이름과 은유를 주고 그 세계의 사건·인간·상태를 아직 세상이 구경하지 못한 독특한 산문으로 서술하고 묘사하는 것이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이 기성의 몽롱한 작가들, 기존의 나른하고 힘없는 소설들, 이미 있어온 맥빠진 언어들과 나태한 시각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고, 비록 군데군데 서툰 구석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발견한 진실, 그가 구성한 새로운 명제들로 그 모든 기성의 것들에 “아니야”라고 말하는 번쩍이는 야성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기를 기대한다. 신예작가가 이 세상에 나오는 방식은 보복의 방식으로서이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런 기대는 과도한 것일지 모른다. 많은 경우 심사자들이 대하게 되는 것은 기본 기량도 갖추지 못한 습작들, 기성 작품을 본따고 이리저리 흉내낸 모작들, 자기 산문의 발견과 제시가 작가의 의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한 낡고 서툰 문장들, 세상을 향해 새로운 문제를 던지려는 의지와 사유의 흔적이 좀체 보이지 않는 정신적 나태, ‘새로운’ 것이란 그냥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들에 대한 성실한 연찬 이후에만 나오는 것이라는 인식 없이 죽은 형식적 새로움만을 시도하는 태도들, 이야기를 짜는 공학적 기술이 기초 수준에도 못 미치는 부실공사들―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나는 지금 내가 지적하고 있는 사항들이 다소 과욕의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필요한 것은 성실한 기량 훈련, 깊이에 도달하려는 사색, 독창성을 향한 자기 교육이라 나는 생각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소설문학에는 작가 지망자들이 ‘모델’로 삼을 만한 작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후진들은 알아두기 바란다. 서사 조직과 제시의 기술 층위에서 우리 소설은 결코 자랑할 만한 모델들을 갖고 있지 못하며, 주제를 구성해내는 사유의 수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요인들의 작용이 있지만, 지금 여기 지적하고 싶은 요인은, 재능의 문제를 제외했을 때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나태와의 싸움에 헌신하기를 꺼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소설을 쓰려는 작가 지망자들이 그 나태를 본받고 계승하지 않기를 바라며 손쉽게 몽롱성을 흉내내지 말기를 희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적과 주문은 결코 과도한 것이 아니다. 소설의 생산과 수용이 사회적 자원을 사용하는 것인 한 비평은 좋은 소설을 요구할 공적 권리를 갖고 있다...
문화일보 기사: '독서가 사람과 사회를 건강하게' 문학평론가 도정일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0312230101223006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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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뒷전으로 밀어놓은 데 대한 부담감이 있을 텐데.
“특별히 관심을 쏟아야할만한 작품도 없었지만…. 어쨌든 한국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방기한 점이 없지 않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5~6년 동안 깊이와 재미를 겸비한 저술 활동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하나의 주제를 체계와 방법론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쓸 생각이다. ‘한국문학은 왜 성장을 멈추었는가?’ ‘왜 걸작이 나오지 않는가?’와 같은 문제도 짚어져야 될 것이다.”
―입맛이 아주 까다로운 건 알지만, 그래도 인정할 만한 작가가 우리나라에 한 명도 없는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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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정일 교수는 어떤 소설을 높이 평가하시는 걸까요.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련 포스트:
[독서] 문학을 찾아서 ― 도정일 (계간 문학동네 2000 년 가을호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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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소설입니다: [독서] 이지형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 / 제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 프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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